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섯 황제의 해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최후의 제위 경쟁자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처단하고 수도 로마로 귀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니게르 및 알비누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내통한 '''원로원 의원 29명을 사형에 처했다.''' 페르티낙스 황제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 뻔 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 역시 반역자 알비누스의 지지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. 뒤이어 세베루스는 추가로 살생부를 만들어,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사들을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해 죽였다. 여기에는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이 국법상 불법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,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위이자 [[하드리아누스]] 황제의 외증손자이며, [[루키우스 베루스]] 황제의 친조카였던 [[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]]도 있었다. '''[[네르바-안토니누스 왕조]]의 몇 안 남은 황족들을 죽이거나''', 협박해 이들이 목소리를 못 내게 한 조치는 이중적이고 비열한 모습이 많았다. 그래서 세베루스는 >'''"푸닉 술라"'''[* 북아프리카 해안의 [[술라]].] 라는 그다지 좋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. 하지만 세베루스는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.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들 및 처가인 시리아 에메사 왕가의 사람들과 그 측근들을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 빈 자리를 채웠다. 새로 편입된 의원들은 세베루스에게 호의적이었던 푸닉(북아프리카) 출신이거나 동방 속주 출신들이 많았다. 그렇지만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누명을 쓰고 몰락해 가난한 평민들과 다를 바 없었던 옛 공화정 시대의 [[파트리키]]와 [[노빌레스]]의 후예들도 포함되었다. 그 이유는 이탈리아와 로마의 옛 몰락귀족들을 명분 쌓기용으로 의원직에 복귀시켜 불만을 줄이고, 지역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. 그 결과, 원로원은 황제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처지로 추락했다.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중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갈리아 및 히스파니아 등 기존 세력의 부와 권력은 푸닉과 동방 출신들의 몫이 되었다. 이렇듯 정적들을 철저하게 숙청한 뒤, 세베루스는 원로원 계급을 권력에서 배제하겠다는 명분하에, 자신과 두 아들, 그리고 시리아 출신의 황후인 율리아 돔나를 신과 신들의 가족으로 강조했다. 그러면서 과거 [[플라비우스 왕조]]의 시절을 참고해, 정적들을 감시하고 이를 위한 관료층을 모았다. 이때 중용된 이들은 [[기사계급]] 출신의 법학자들이었는데, 이는 세베루스 왕조가 '''법학자들의 시대'''로 불리며 [[관료제]]가 고도화되는 원천이 되었다. 또한 세베루스는 광대한 제국의 유일무이한 단독황제로 집권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군대의 복지를 대폭 개선하여 군단병들의 급여를 375데나리우스에서 500데나리우스로 인상했으며, 일반병들이 변경의 일반 군단에서 본국 이탈리아의 근위대와 최고직 중 하나인 근위대장직까지 승격하는 코스를 누구나 갈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꾸었다. 이렇듯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권력 기반을 든든히 다지면서, [[세베루스 왕조]]는 향후 40여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. [[분류:로마 제국 내전]][[분류:2세기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